매년 11월 30일이면 필리핀의 국경일인 보니파시오 데이(Bonifacio Day)가 돌아온다. 이날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 1863년~1897년)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로, 2007년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에 의해 선포되었다.
▲<사진 1> By La Ilustración Española y Americana
사진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
보니파시오가 태어날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신음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필리핀 각지에서는 스페인 통치에 항거하는 시위와 반스페인 여론이 나타났다.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전에는 생계를 위해 배달부와 상점 점원 생활을 했고, 14세에는 부모를 모두 잃고 네 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독학과 다독을 통해 박식을 갖춘 그는, 이후 필리핀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현재의 마닐라 톤도 지역에서 필리핀 독립운동의 영웅인 유명한 호세 리잘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 ‘라 리가 필리피나(La Liga Filipina)’ 창립(1892)에 참여하게 된 것이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 마닐라 시내 중심부에는 지금은 시내 관광의 주요 코스인 호세 리잘 공원이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참정권과 시민권, 비폭력 저항을 주창한 리잘과는 달리 보니파시오는 무장 독립 투쟁을 주창하였다.
보니파시오는 마닐라에서 비밀결사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을 결성하고 비밀리에 시민과 지식인 등 2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1896년 8월 카티푸난을 이끌고 ‘푸가드 라윈의 통곡’이라는 이름의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선언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스페인 군대에 거듭 패배해 퇴각하기에 급급해진다. 이러한 와중에 같은 해 12월 30일 호세 리잘이 스페인에 의해 마닐라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고, 보니파시오는 계속 항전을 선언하지만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한다. 그때 그의 부관 중의 하나인 에밀리오 아기날도도 다른 곳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사진 2> Andres Bonifacio Monument by Ramon Martinez
사진 출처 : www.wikipedia.org
하지만 스페인이 반란자들을 체계적으로 색출하고 이들의 근거지와 계획들까지 노출됨에 따라 보니파시오는 점점 무능한 지도자로 몰린다. 결국에는 카티푸난 회의에서 신망을 잃고, 급기야는 1897년 보니파시오 대신 아기날도가 필리핀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라는 새 대통령 추대와 카티푸난 회의의 결정에 반발한 보니파시오는 독자적인 정부를 추진하려고 하였지만, 스페인군과 이미 정적이 되어버린 아기날도 양측의 공세에 의해 세력이 위축되었다.
▲<사진 3>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초상이 그려진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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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97년 4월,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의해 체포되어 그 해 5월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이 일으킨 폭동에 참가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분티스 산에서 동생과 함께 총살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재평가되어, 필리핀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게 되었다. 후일 필리핀 육군 본부가 위치한 곳을 이 보니파시오의 이름을 따서 ‘포트 보니파시오(Fort Bonifacio)’라 명명한다.
포트 보니파시오는 마닐라의 마카티시에서 동쪽에 있는데, 마닐라의 떠오르는 대규모 신도시고 주거, 쇼핑, 학교, 병원 등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지금도 개발이 한창이다. 최근에는 필리핀 부동산 경기를 주도하고 있으며, 유명한 쇼핑몰인 ‘마켓마켓’과 ‘SM 아우라몰’도 이곳에 있다. 특히, 유명한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도 밀집해 있어 마닐라 여행 때마다 들러볼 수 있는 곳으로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