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불꾸불 산길을 내려가면서 곳곳에 퍼진 계단식 논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떻게 저런 형태로 돌을 쌓아서 논을 만들어 놓았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보기에는 이 부근에 사는 인구라고 해봐야 수백 명 남짓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 그래서 필리핀 내에서도 이곳이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하는 말에 수긍이 갔다.
급기야 이제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군대 유격 훈련 이후로 처음으로 극기 훈련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에게는 짐이 많았다. 개인 짐이야 가방 한 개라 하겠지만 문제는 먹을 것들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삼겹살과 소주를 준비해 가고 있었는데 정말 이런 길을 오르내릴 줄 알았다면….
내려가는 중간에 현지 아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모두 천진난만하게 외부 여행객들을 친절히 맞이해 주었다. 화답으로 우리가 준비한 초코파이나 뻥튀기 등의 간식거리도 나누어 주었는데 정말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기뻤다. 필리핀 여행을 다니면서 우리가 배운 것 중의 하나가, 요런 간식거리들을 많이 준비해 다니면 정말 쏠쏠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절반 정도 내려가니 바타드 계단식 논의 전체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말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장관이었다. 한쪽 산자락 전체에 깎아지른 듯 펼쳐진 계단식 논. 단일 규모로는 제일 크고 멋진 광경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바타드 마을의 제일 중심지까지 내려왔다. 모두 꿀맛 같은 휴식시간을 잠시 가졌다.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니, 위에서 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까마득히 올려다보였다. 다시 올라가라면 못 갈 것만 같았다.
우선, 가이드 아주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숙소에 집을 풀었다. 여기는 두메산골이다. 전화 신호도 안 잡혔다. 이런 난감함이라니! 외부로 연락할 길이 없는 것이다. 정말 깊은 산중의 적막한 시골 마을에 온 것이다. 여기 바타드에는 계단식 논 말고도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바로 폭포다. 폭포는 바타드 마을에서도 좀 더 들어가야 했는데, 힘든 여정에 굉장히 지친 우리도 갈까 말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마음에 다녀오기로 했다. 다시 한 번 오르락내리락 숨을 헐떡거리면서 도착한 폭포. 폭포수는 시원하게 내리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폭포수 물에 얼굴을 힘차게 씻었다. 시원한 물이 우리의 지친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폭포를 뒤로하고 마을로 돌아와 힘들게 싸 들고 온 재료를 가지고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첩첩산중에서 먹는 이 맛이야말로 말로는 결코 다 표현할 수 없는 맛일 것이다. 저녁을 먹고 반딧불을 벗 삼아 산중의 고요함을 더 만끽하고 나서야 취침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주머니가 차려준 아침에 컵라면으로 요기하고 기념으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이제 곧 떠나야 할 시간.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이곳 사람들과 정이 들었다.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하고, 가이드 아주머니를 따라 바나우에로 돌아왔다. 드디어 우리 차량을 만나 가이드 아주머니와도 인사를 하고 마닐라로 돌아왔다.
고생스러웠던 만큼, 그리고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에, 그리고 정말 적막강산에 파묻힌 곳이라는 점에서 이번 바타드 마을 방문은 필리핀의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의 장소가 된 것 같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그 장면들이 남아 있으니.